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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북양군벌③] 북양군벌들의 내전

by 너귤맨 2021.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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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서는 황제를 다시 세운 장훈복벽과 안휘군벌을 몰아내고 새롭게 베이징 정부의 주인이 된 직예군벌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번화에서는 더 혼란스러운 군벌들의 내전에 대해 살펴봅시다. 


 

 

직예군벌이 베이징 정부를 이끌기 시작했지만 절강성이나 상하이 등지에는 아직도 안휘군벌의 세력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안휘군벌의 잔존세력들은 직예군벌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규합해 직예군벌과 다시 전쟁을 벌입니다. 1924년 일어난 이 전쟁을 강절전쟁이라고 합니다. 직예군벌은 이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하지만 안휘군벌의 잔존 세력을 돕기 위해 남하하던 장쭤린의 봉천군벌과 2차 직봉전쟁(봉직전쟁)을 벌이는데 여기서 직예군벌들은 패배하게 되었습니다. 봉천군벌이 이겼던 이유는 2년 전 1차 직봉전쟁에서 패한 이후 2년 동안 군사력을 증강시킨데다, 직예군벌 중 펑위샹(풍옥상)이라는 사람이 직예군벌을 배신하고 봉천군벌로 붙었기 때문입니다. 펑위샹이라는 인물은 군벌시대 배신의 아이콘이었습니다. 펑위샹은 처음에 안휘군벌이었다가 안직전쟁때 안휘군벌을 배신하고 직예군벌의 우페이푸 밑으로 들어왔었습니다. 그랬던 것이 직예군벌의 실세인 우페이푸와 마찰을 겪어 2차 직봉전쟁때는 직예군벌을 배신하고 봉천군벌의 편이 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한때 베이징 정부를 이끌다 쫓겨난 안휘군벌의 돤치루이와 쑨원의 국민정부도 봉천군벌의 편에 서서 세 세력이 삼각동맹을 맺은 것이 봉천군벌의 승리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 펑위샹 -

 

 

 

펑위샹은 직예군벌을 배신하고 베이징을 점령했습니다. 펑위샹은 그동안 베이징에 살던 청나라 황실 사람들은 전부 몰아내기도 했습니다. 펑위샹은 직예군벌을 배신하면서 봉천군벌의 장쭤린의 편에 붙었지만 베이징을 독식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장쭤린은 자신의 군대를 베이징으로 끌고 들어와 장쭤린의 군대를 밀어냈습니다. 펑위샹은 대항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세력보다 봉천군벌의 세력이 더 컸기에 베이징을 장쭤린에게 넘겨주고 물러갑니다.

 

- 봉천군벌의 수장 장쭤린 -

 

 

 

 

삼각동맹(장쭤린, 돤치루이, 쑨원)은 돤치루이를 새 정부의 임시집정으로 뽑았고 국민정부의 쑨원도 베이징으로 불렀습니다. 쑨원은 '국민회의'를 소집하여 앞으로 중국 근대화에 대한 방향을 잡으려고 했으나 이미 병마에 시달리던 쑨원은 도중에 사망하였습니다. 이제 북양의 3 군벌 중 봉천군벌이 실세가 되었고 안휘군벌의 돤치루이도 군사적 기반은 적지만 중앙 정부의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봉천군벌이 중국 각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군벌이 되었지만 동남부 지방에서의 행패 때문에 여러 불만이 많았습니다. 이 불만을 이용해 직예군벌의 쑨촨팡(손전방) 봉천군벌을 몰아내자며 군대를 일으켰고 봉계군은 몇 번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버렸습니다. 이 전쟁을 손봉전쟁이라고 합니다. 쑨촨팡은 결국 저장성과 장쑤성등 양쯔강 유역의 5개성을 차지하는 대군벌이 되어 군벌들의 세력은 또 분산이 되었습니다. 여담으로 군벌들의 군대가 전쟁에서 밀리는 기세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전쟁에서 대패하거나 싸우지도 않고 도망치는 건, 애국심이라던가 목적을 위해 모인 군대가 아니라 그저 먹고살기 위해 군벌들의 밑으로 들어간 군인들의 한계였습니다.

 

- 쑨촨팡 -

 

 

 

베이징에서 쫓겨난 펑위샹이 세력이 커진 쑨촨팡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봉천군벌의 위험이 되자 장쭤린은 과거 논공행상의 문제로 봉천군벌에서 벗어나 일본으로 가 있던 봉천군벌 출신의 뛰어난 지휘관 궈쑹링(곽송령) 불렀습니다. 펑위샹을 견제하려고 불렀던 궈쑹링은 오히려 민생을 생각하지 않고 세력다툼을 위한 전쟁만을 벌이는 장쭤린을 몰아내야 한다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반란을 반봉사건이라고 합니다. 장쭤린은 반란을 진압하고 궈쑹링을 사형시키지만 손봉전쟁과 반봉사건으로 봉천군벌의 힘이 많이 약해졌습니다. 이 틈을 타서 펑위샹은 돤치루이의 부하 쉬수정을 암살하는 등 세력을 확장합니다.

 

 

 

과거 '2차 직봉전쟁'때 펑위샹이 직예군벌을 배신해서 우페이푸가 베이징에서 쫓겨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페이푸는 그 누구보다 펑위샹에 대해 적개심이 강했습니다. 공통의 적은 동맹을 맺어주기에 장쭤린은 펑위샹에 대한 적개심이 강한 우페이푸와 동맹을 맺었고 산시성의 옌시산(염석산)과도 동맹을 맺었습니다. 옌시산은 산시성의 군벌이었는데 다른 군벌들이 세력다툼을 할 때 중립을 유지하며 산시성의 경제를 발전시키며 여성교육 등 사회문제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산시성을 노린 펑위샹을 견제하기 위해 중립을 풀고 장쭤린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장쭤린의 봉계군과 우페이푸의 직계군, 그리고 옌시산의 군대는 펑위샹을 공격했고 결국 펑위샹은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 옌시산 -

 

 

 

펑위샹을 몰아낸 1926년. 영원한 적도 동맹도 없는, 전쟁과 배신이라는 혼란이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을 즈음 중국의 남쪽에서는 장제스(장개석)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 취임했습니다. 쑨원이 죽은 이후로 장제스는 자신의 정적들을 차례로 제거해가며 스스로 국민정부 수장의 위치에 올랐으며 남쪽의 군벌들을 무찌르고 흡수하며 약 10만 명 정도의 국민군을 만들어냈습니다. 장제스는 총사령관 취임식날 북벌을 실시한다는 선언을 했고 남부와 중부의 주요 도시들을 함락하며 북쪽으로 올라왔습니다. 

 

- 장제스 -

 

 

 

장제스는 우선 우한의 우페이푸를 공격했습니다. 우페이푸는 끝까지 싸우려고 했으나 잇따른 패배와 부하들의 도망으로 결국 퇴각하고 말았습니다. 우페이푸는 같은 직예군벌 출신인 쑨촨팡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쑨촨팡은 장제스와 협상을 위해 지원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쑨촨팡은 장제스와 전쟁 대신 협상을 하려고 했지만 장제스의 조건은 군벌의 지위를 포기하고 국민당에 들어오는 조건을 걸었기에 자신의 세력을 지키고자 했던 쑨촨팡은 협상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쑨촨팡은 장쭤린과 동맹을 맺어 대항하려 했지만 장제스에게 패배해 북쪽으로 피신합니다. 직예군벌에게 공격을 받던 펑위샹은 장제스의 북벌 덕분에 겨우 살아 장제스의 국민당 휘하로 들어갑니다. 장쭤린과 우페이푸와 동맹이었던 산시성의 옌시산은 장제스가 직접 공격 오진 않았지만 국민당에 가담하는 것이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해 국민당의 휘하로 들어갔습니다.

 

- 장제스의 북벌 -

 

 

 

이때까지만 해도 장제스의 국민당은 좌파와 우파가 함께 합작하던 상태였습니다. 그렇기에 소련도 지원을 했었지만 장제스는 북벌을 하던 와중에 좌파를 몰아내기 위해 1927년, 상하이에서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장제스의 쿠데타로 인해 우한의 좌파 국민당 정부와 상하이의 우파 국민당 정부가 나뉘게 되었습니다. 상하이의 우파 국민당 정부는 북양군벌의 베이징 정부와 좌파의 우한 정부를 동시에 상대할 수가 없어 장제스는 사퇴하게 되고 좌파와 우파는 다시 합작(영한합작)을 했습니다. 

 

 

국민당의 북벌은 장제스의 하야로 잠깐 멈추게 되지만 1928년 1월, 장제스는 다시 복귀를 하고 2차 북벌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장제스는 국민군과 더불어 1차 북벌 때 자신에게 항복했던 풍계군(펑위샹), 염계군(옌시산)을 이끌고 봉천군벌인 장쭤린을 공격합니다. 이 시점에서 봉천군벌은 장제스에게 박살당한 직예군벌을 흡수하며 최후의 북양군벌이 되어 있었습니다.

 


다음 마지막편에서는 북양군벌의 몰락과 함께 군벌 전체가 쇠퇴해가는 과정을 알아보겠습니다. 

 

 

 

참고자료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알랭 루, 「20세기 중국사」

조관희, 중국현대사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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