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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북양군벌②] 위안스카이 이후 북양의 3군벌

by 너귤맨 2021.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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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서 북양군이 등장하게 되었던 배경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이번화에서는 위안스카이의 사후 북양군벌에 대해 알아봅시다.

 


위안스카이는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가 여론의 몰매를 맞고 황제를 포기한 후 죽어버렸습니다. 위안스카이 사후 그의 권력은 '리위안훙(여원홍)'과 '돤치루이(단기서)'로 양분되었습니다. (동탁이 죽고 나서 이각과 곽사가 권력을 나눠가진 것이랑 비슷하네요) 리위안훙은 대리총통직을 맡게 되고 돤치루이는 국무총리직을 맡게 됩니다. 이때가 한창 제1차 세계대전 중이었습니다. 세계대전 발발 당시에 위안스카이는 중국을 중립국이라 선포했지만, 미국과 영국은 중국에게 독일과 단교하고 세계대전에 참전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돤치루이는 세계대전에 참전하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배상금(의화단 사건으로 인한 배상금)을 내지 않아도 되고 미국과 영국의 동맹국이 되어 전쟁에 승리하면 중국이 얻을 이점이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해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전쟁 반대파도 많았습니다. 리위안훙또한 총통의 권한으로 참전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 안휘군벌의 수장인 돤치루이 -

 

 

 

돤치루이는 전쟁 참가를 위해 국회의원들을 위협하며 강제로 진행을 하려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국회의원들은 돤치루이에게서 돌아서고 리위안훙은 돤치루이를 국무총리에서 해임시켰습니다. 돤치루이가 해임되자 '장쉰(장훈)'이라는 인물은 해임된 돤치루이의 편을 들어 각 지방에게 뤼위안훙의 타도를 요구하며 선동했고 해임당한 돤치루이는 지방의 각 성(省)에게 중앙정부로부터 관계를 끊어라고 얘기하며 보복했습니다. 리위안훙은 고립이 되자 협상을 위해 장쉰을 베이징으로 불렀습니다. 장쉰은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베이징에 입성했는데, 사실 장쉰이 돤치루이를 도와 리위안훙 타도를 주장했던 것은 돤치루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베이징에 입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장쉰은 사실 황제의 복권을 염원하던 청나라의 마지막 충신이었거든요. 계획대로 베이징에 들어온 장쉰은 자신의 군대를 이용해서 리위안훙을 협박했습니다. 리위안훙은 결국 장쉰의 강요에 중화민국의 국회를 해산하게 됩니다.

 

 

 

-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른 푸이 -

장쉰은 신해혁명과 위안스카이의 배신으로 인해 어린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난 마지막 황제 '푸이'를 '선통제'로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올렸습니다. 하지만 민심은 이미 황제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돤치루이는 자신의 병사들을 이끌고 베이징으로 진격했습니다. 돤치루이의 수만 군대가 온다는 소식과 비난 여론에 장쉰의 무리는 거의 이탈했고 장쉰과 몇몇의 병사만 황제를 지켰으나 결국 베이징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고작 12일 만에 푸이는 다시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이 사건을 「장훈복벽」이라고 합니다. 

 

 

 

 

*북양 3 군벌

 

당시 중국에서는 지방의 작은 군벌부터 국제 외교권을 가지고 있는 큰 군벌까지 약 1300개의 군벌들이 난립했었습니다. 쓰촨성의 경우 인구의 3% 정도가 군벌들의 사병화가 되었다고 합니다. 많은 군벌들 중에서 가장 세력이 강했던 군벌은 위안스카이의 뒤를 이어 북양군을 계승한 '북양군벌'입니다. 북양군은 위안스카이라는 구심점을 잃고 나서 세 개의 파벌로 나뉘었습니다. 이들은 각각 <안휘군벌>, <직예군벌>, <봉천군벌>라고 불리었습니다.

 

<안휘군벌> : 안후이 파. 또는 환계라고도 합니다. 국무총리에 있었던 돤치루이가 수장으로 있었습니다. 위안스카이로부터 받은 고위 직책을 가지고 군벌시대에 첫 번째로 베이징 정부를 이끌었습니다. 

 

<직예군벌> : 즈리 파. 또는 직계라고도 합니다. 펑궈장이 수장으로 있는 군벌입니다. 펑궈장은 장훈복벽 사건 때 리위안훙으로부터 총통직을 받습니다.

 

<봉천군벌> : 펑톈 파. 또는 봉계라고도 합니다. 과거 마적단이었던 장쭤린이 위안스카이의 북양군으로 들어가면서 생긴 파벌입니다. 그렇기에 중앙 정부의 요직을 차지했던 안휘·직예군벌과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북양군벌 이외에도 수많은 군벌들이 등장했습니다. 내용 관계상 전부 알아볼 수는 없지만 북양군벌들과 자주 엮이는 군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염계라고 불리는 <염계군벌>과 나중에 독립하게 되는 풍계라고 불리는 펑위샹의 <풍계군벌>등이 있습니다. 

 

군벌의 세력은 자주 바뀌기에 참고만 하시면 좋습니다

 

 

 

「장훈복벽」사건 이후 장쉰을 몰아낸 돤치루이는 중국의 세계대전 참전을 결정하고 독재를 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쑨원은 반발하여 남쪽의 군벌들과 연합을 맺고 돤치루이를 타도하기 위해 호법전쟁을 일으킵니다. 돤치루이도 남방 정벌군을 조직해 전쟁은 커질 위험성이 있었지만 직예군벌의 펑궈장(풍국장)이 양측을 화해시키며 전쟁은 흐지부지하게 끝납니다. '호법전쟁'이 끝난 이후 돤치루이는 세계대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대전 참전을 핑계로 참전군을 만들어 자신의 세력을 넓혀가며 독재를 했습니다. 1919년에는 외몽골 지역에 출병하여 몽골의 독립을 막았는데 몽골은 만주와 가까운 지역이라 만주에 거점을 둔 봉천군벌은 불만이 많았습니다.

 

 

 

안휘군벌은 일본에게 차관을 받고 자신의 세력을 넓히는 데에 쓰는 등 독주가 심해지자 직예군벌과 봉천군벌의 불만이 심해져갔습니다. 그러다 안휘군벌의 쉬수정(서수쟁)이 봉천군벌의 수장인 짱쭤린(장작림)을 암살하려다 실패하면서 직예군벌과 봉천군벌은 동맹을 맺고 1920년에 안휘군벌과 전쟁을 벌입니다. 이 전쟁을 안직 전쟁이라고 합니다. 전쟁이 벌어졌지만 지휘관 쉬수정은 봉천군벌과의 전투에서 도망가버리고 직예군벌의 우페이푸(오패부)도 봉천군벌을 궤멸시켜 봉천군벌은 쉽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떄 안휘군벌과 함께 돤치루이도 실각하게 됩니다. 안휘군벌이 무너질때 일본은 재빠르게 안휘군벌과 관계를 끊고 새롭게 봉천군벌을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일본의 지원을 받는 봉천군벌과 달리 직예군벌은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안휘군벌을 대신해 새롭게 베이징을 점령해 정부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직예군벌과 봉천군벌은 안직전쟁때 함께 싸웠지만 베이징 정부는 직예군벌이 가져갔습니다. 이에 봉천군벌은 일본의 지원을 받으며 직예군벌과 전쟁을 벌입니다. 1922년 일어난 이 전쟁을 1차 직봉전쟁(봉직전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봉계군은 패배해 만리장성 너머로 쫓겨나게 됩니다. 안휘군벌과 봉천군벌을 몰아내고 베이징 정부를 차지한 직예군벌의 수장은 차오쿤(조곤)었습니다. 차오쿤은 대총통이 되었고 안직전쟁과 직봉전쟁을 승리로 이끈 직예군벌의 실세인 우페이푸가 차오쿤을 적극 지지했습니다. 

 

- 타임지에 '가장 영향력이 강한 중국인'으로 뽑힌 직예군벌의 우페이푸 -


 

다음 편에서는 직예군벌에 대항하는 봉천군벌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참고자료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알랭 루, 「20세기 중국사」

조관희, 중국현대사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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