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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광복 후 조선의 일본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by 너귤맨 2021.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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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역사를 배우면서 사건의 시작에 주로 초점을 맞춥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의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에 대해서는 잘 알아도, 임진왜란이 몇 년도에 일어났는지는 잘 알아도 그 마무리에 대해서는 비교적 생소합니다. 일제강점기 또한 발생했던 원인과 과정에 대해서는 많이 배웠지만 종결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많이 다루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역사 사건의 마무리란 다음 사건의 시발점이 되기 때문에 시작과 끝의 경중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고로 이번에 알아볼 지식은 일제강점기의 마무리, 그중에서도 한반도에 남은 일본인들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945년 8월, 일본에는 두 번의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만주에 소련이 침공해오자 우여곡절 끝에 일본군의 수뇌부는 8월 15일에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합니다. 당시 일본은 연합국과의 종전 협상이라고 했지만,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항복이었습니다. 포츠담 선언의 제8항은 아래와 같습니다.

 

[ 8. The terms of the Cairo Declaration shall be carried out and Japanese sovereignty shall be limited to the islands of Honshu, Hokkaido, Kyushu, Shikoku and such minor islands as we determine. ]

[ 8. 카이로 선언의 합의 조건들이 이행되고 일본의 통치권은 혼슈, 훗카이도, 큐슈, 시코쿠와 그 외 우리가 정한 부속도서들로 제한이 될 것이다. ]

 

8항에서 언급된 카이로 선언 또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 ...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

[ ... 적절한 시기에 한국은 자유와 독립이 될 것이다. ]

 

- 연합국의 문서에 서명하는 시게미츠 마모루 -

 

이렇게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임으로써 일본은 해외 식민지를 포기하게 되었고 한국은 독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독립을 하게 되자 식민지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본국인 일본으로 되돌아오게 되는데, 이들을 히키아게샤(引揚者)라고 부릅니다. 전쟁이 끝나 일본으로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히키아게샤 집단, 일본인(본토인) 집단, 한국인(피식민인) 집단들은 다른 반응을 보여왔는데 각 집단의 관점에서 히키아게샤를 알아보겠습니다.

 

 

 

 

 

1945년, 당시 일본은 이미 패색이 짙어졌지만 일본 제국의 군부는 일본과 식민지의 1억 인구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라는 1억 총옥쇄를 말하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일본이 쉽게 항복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두 번의 핵폭탄과 소련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최악이 되자 히로히토 덴노(일왕, 천황)는 일본군 수뇌부와의 어전회의에서 포츠담 선언에 대한 수락을 결심합니다. 8월 14일 라디오 방송에서는 다음날 덴노의 중대한 발표가 있을 것이니 모든 일본인들은 정오에 방송을 들으라고 얘기했습니다. 다음날인 8월 15일 정오, 라디오에서는 덴노의 항복 선언이 울려 퍼졌습니다. 이 방송을 들을 일본인들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제 자유가 된 조선인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빨리 일본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의외로 식민지에 그대로 살고자 하는 일본인도 많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 일본의 식민지 -

일본은 19세기 말부터 수십년간 해외 식민지를 지배해왔습니다. 그 시간 동안 한반도, 만주, 중국, 타이완 등 해외 식민지에는 수백만의 일본인들이 식민지로 이주했으며, 그들 중에는 아예 해외영토에서 태어나고 자란 식민지 2세, 3세들도 있었고 식민지의 사람과 결혼을 통해 국적이 융합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1930년대엔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30% 이상이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들이었습니다. 이들에 있어서는 식민지 땅 자체가 자신들의 고향이자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집과 재산, 직업, 인간관계를 모두 버리고 오히려 생소한 일본땅으로 가는 것이 더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잔류하기를 원하는 일본인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 일본인 세화회였습니다. 하지만 항복한 일본정부 대신에 일본을 통치하던 GHQ는 한반도 남부의 모든 일본인 송환을 명령했고 일본인 세화회는 잔류를 지원하는 단체에서 송환을 지원하는 단체로 바뀌어 극소수의 일본인을 제외한 일본인은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조선 내의 일본인들은 미국에서 마련한 배를 타고 일본으로 되돌아갔는데, 일본으로 들고 갈 수 있는 짐은 두 손에 들고 갈 정도의 짐과 소지금 1000엔으로 제한했습니다. 이렇게 가지고 갈 수 있는 재산이 제한되자 일본인들은 소지하던 가재도구들을 시장에 전부 팔려고 내놓았고 이런 물품들의 투매시장이 한반도 곳곳에 생겨났습니다.

 

 

 

- 어선을 타는 히키아게샤 -

GHQ는 배가 넉넉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군인들을 일본으로 송환했고 민간인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일본인들은 광복 직후, 회사에서 추방당하고 자영업을 금지당했기 때문에 일본으로 송환되기 전까지 가재도구를 팔아 생활비를 마련하거나 식민지 기간과는 다르게 오히려 조선인 밑으로 들어가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더러는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되돌아갔는데, 이 밀항선은 일본으로 가는 히키아게샤들과 조선으로 되돌아오는 조선인들을 교환하며 성행했습니다.

 

 

 

해방이 되자 조선인들은 일본인이 살던 집을 적(敵)의 재산과 집이라는 의미로 적산가옥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적산가옥은 모두 미군정과 남한 정부가 소유권을 가져갔으며 그 안의 물건들은 조선인들이 차지했습니다. 일본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재산의 손실이겠지만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본디 조선인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재산으로 보였을 겁니다. 또한 광복후에는 한일 관계가 반전이 되어 강제 징용을 당하고 조선으로 돌아온 몇몇의 조선인들은 일본인 세화회에게 가서 보상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 서울에 남아있는 적산가옥 -

 

 

 

이렇게 재산을 잃고 일본으로 돌아가는 히키아게샤였지만 미국이 운영하는 한반도 남쪽의 히키아게샤는 상황이 나은 편이었습니다. 만주와 북한의 일본인들은 소련의 점령하로 들어갔는데 일본인들에게 로스케라고 불리는 소련군은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제식이 잘 갖춰진 미군들과 달리 소련군은 머리를 풀어헤쳤으며 문신투성이에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렸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소련군이 무서웠던 점은 바로 약탈과 강간, 수용소 억류, 노동자 차출이었습니다. 어째서 미군과 이렇게 차이가 나는지는 당시 소련의 전체적인 상황을 보면 이해가 됩니다.

 

 

 

일본의 항복과 함께 2차 세계대전은 끝이 나면서 소련은 전승국이 되었지만 국가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독일과의 전쟁으로 2천만 명이 넘는 국민이 죽었고 국민총생산 또한 17%나 감소했습니다. 특히나 생필품이 절대적으로 모자라던 시기였습니다. 즉, 노동 인구가 없는 데다 보급 물자를 조달해주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소련군은 보급품과 급료를 일본인들에게서 빼앗으며 조달했습니다. 또한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서 일본인을 강제로 러시아의 공장으로 보내 일을 시켰습니다. 특히 고급 기술을 가지고 있는 일본인 엔지니어는 소련군에게 큰 전리품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본인을 일본으로 송환시켜 주려는 미군과는 달리 소련은 일본인들을 잡아 수용소로 넣었습니다. 자국 군인들의 보급도 제대로 되지 않는 소련의 수용소는 일본인들에게 말 그대로 지옥이었습니다. 소련의 수용소에서 수천 명이 죽고 많은 일본인들은 목숨을 걸고 한반도 남부로 도망쳤습니다. 미국이 한반도 북부와 만주의 일본인 송환에 관해 협의를 요청하였는데도 소련이 협의를 계속 거부해온 것도 보급의 현지 조달과 노동력 착취를 위한 이유에 있습니다.

 

-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 -

 

 

 

 

조선인들의 입장에서는 일본인들의 수용소 생활은 일본인들이 자초한 문제였습니다. 일제감정기 시기 조선의 심각한 주택난을 식민 정부는 방치하였습니다. 애당초 일제강점기의 일본인들은 일본인 마을을 조선과 구분하여 따로 만들어 각종 편의를 향유하며 살았기에 주택난이 문제라고 해도 그 피해는 조선인이 받는 것이라 식민 정부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패전 이후 일본인들은 주택 공급의 가장 마지막 순위가 되었기에 무주택의 일본인들이 수용소로 가서 생활하는 것은 자신들이 자초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일본으로 들어온 히키아게샤들에게 송환 과정보다 더 힘든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일본에서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일본 본토에 마련된 히키아게샤 임시 수용소는 반영구시설이 되었습니다. 맨몸으로 돌아와 본토에 거처가 없는 히키아게샤들은 치솟는 물가와 집세를 낼 여력이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본토인들에게 차별과 멸시를 받는 삶은 히키아게샤들을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본토인들에게 히키아게샤는 민폐 집단이었습니다. 오랜 전쟁으로 인해 민생과 경제가 파탄 나게 되어 허덕거리는 상황에서 입을 줄이기는커녕 해외에서 수백만명의(한반도에서만 돌아간 일본인 숫자만 해도 92~100만 명이었습니다) 히키아게샤가 몰려드는 상황을 매우 좋지 않게 바라봤습니다. 식민지에서 식민지인들 위에서 떵떵거리며 호화스럽게 살다가 패전을 하고 나니 빈민층으로 대거 전락해 도둑질을 일삼거나 전염병이 퍼지게 되는 원인이 되자 이들을 좋게 바라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히키아게샤는 식민지에서는 지배자로 기억이 되고 본토에서는 민폐 집단이 되었으며, 스스로는 기반을 잃고 쫓겨난 전쟁의 희생양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특정 집단의 입장이 아닌 각 집단의 눈으로 히키아게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혼란스러운 전쟁의 말기에 뒤섞인 '가해자'와 '피해자'는 우리에게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는 논점을 전해 주기 때문입니다. 히키아게샤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자료 :

이연식, 「조선을 떠나며」

최영호, 「일본인 세화회」

사진자료:

한국관광공사

tangonotimei.com

오마이포토(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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