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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북양군벌①] 배경:청나라 군사조직의 변화와 위안스카이까지

by 너귤맨 2021.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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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가 크면 지배하기 어렵습니다. 인구가 많아도 지배하기 어렵습니다. 영토도 큰데 인구까지 많으면 지배하기는 더 어렵죠. 그래서 중국사를 보면 전쟁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특히 중앙정부의 힘이 약해지면 각 지방에서 힘을 가진 사람들이 중앙정부 대신 독자적으로 지역을 다스리고는 했습니다. 이 힘의 토대가 군사력인 경우 우리는 이 실권자들을 '군벌'이라고 부릅니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삼국지연의 또한 동탁, 원소, 조조 등 많은 군벌들이 세력 다툼을 하는 이야기이죠. 

 

 

이번에 알아볼 지식은 근대 중국의 군벌, 특히 세력이 제일 강했던 '북양군벌'입니다. 하지만 내용이 많이 길어져서 4화에 걸쳐 알아볼 텐데 이번화에서는 북양군벌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중국의 마지막 통일왕조이자 강력했던 제국인 청나라는 북방의 민족인 만주족이 명(明) 제국을 흡수하면서 세워졌습니다. 만주족은 팔기군(팔기제)라는 지휘체계를 통해 몽골을 정복하고 조선을 항복시켰으며 끝내 명나라에 이어 중원을 지배하는 제국을 만들었습니다. 청나라는 통일 이후 한족과 여러 민족을 지배하게 되었기 때문에 팔기몽고, 팔기한군 등 피지배 민족의 팔기군도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황제 직속이자 지배계층은 만주족으로 이루어진 팔기군이었습니다. 적은 수의 만주족이 중국 대륙의 한족들과 타민족들을 지배하기 위해서 황제는 각 지방으로 팔기군을 보내고 그곳에서 사택과 녹봉, 퇴직 후엔 연금까지 주며 직업군인화 시켰습니다. 

 

- 팔기군의 8가지 구분 -

 

 

 

 

만주족이 중원을 지배하게 만들었던 강력했던 군사조직 팔기군도 백 년이 넘는 평화시기가 오자 과거의 용맹함을 잃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팔기군은 실전 경험이 없어지고 국가에서 주는 혜택의 안락함에 젖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시기의 유럽에서는 무기, 군함, 전술체계 등이 신식화 되었고 나날이 새로워졌습니다. 결국 청나라는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운동을 겪으며 정부군의 무력함을 깨달았습니다. 청 정부는 태평천국운동에서 뛰어난 진압 실력을 보여줬던 이홍장(李鴻章)과 그의 의병을 높게 평가해 청나라의 정규군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정부의 지지를 통해 이홍장은 양무운동을 주도하며 신식무기로 무장한 북양군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자칭 아시아의 무적함대라는 북양함대도 창설했습니다. 

 

- 이홍장 -

 

 

 

 

이홍장과 청나라는 나름 근대화된 신식 군대를 운영한다는 자신감에 차있었습니다. 하지만 군대 지휘계층은 근대적 전술에 관한 이해가 전혀 없었고 편대와 편성도 체계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비리가 없는 곳이 없어 군비는 줄줄 새어 나갔습니다. 이렇게 겉만 번지르르하던 이홍장의 북양군과 북양함대는 결국 자신보다 체급이 더 작았던 일본으로부터 '청일전쟁'에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청일전쟁의 패배로 이홍장을 실각하게 되고 청의 군대는 그의 후임인 위안스카이(袁世凱, 원세개 ooo...)가 이어받게 됩니다.

 

- 북양함대의 철갑함, 정원. 비싼 가격을 치르고 독일에서 진수되어 북양함대로 들어왔지만, 청일전쟁 중 일본에게 나포되지 않게 자폭함 -

 

 

 

 

위안스카이는 독일의 육군을 본보기로 삼고 새롭게 '신건육군(줄여서 신군)'을 조직했습니다. 북양지역의 신군은 근대식 사관학교 '북양무비학당'의 출신이 많아서 '북양신군'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위안스카이는 보병, 공병, 포병, 기병, 의무대 등 지금까지와는 다른 근대식 군대를 독일인 군사 고문을 초빙해 강하게 훈련시켰습니다. 신군은 청나라의 각 성에 편성되었습니다. 이 중에서 베이징으로부터 떨어진 화남지역에 배치된 젊은 신군들은 쑨원 등에 의해 혁명사상을 가진 사람이 많았습니다. 결국 우창 지역에서 신군과 혁명파가 봉기를 일으키게 되고 신해혁명이 일어납니다. 혁명이 일어나자 중국 중부와 남부의 여러 성들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청 제국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 영화 <신해혁명 1911>의 한 장면 -

 

 

 

 

혁명 당시 청 제국의 황제는 5살짜리 '푸이'였습니다. 푸이 대신 섭정을 하고 있던 아버지 순친왕은 급하게 위안스카이를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해 혁명군을 막으라고 했습니다. 신군중에서 위안스카이가 지휘하는 북양신군은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였기 때문입니다. 황제로부터 혁명군을 막으라는 명령을 받은 위안스카이는 혁명군과 협상을 하게 됩니다. 혁명군이 봤을때도 위안스카이의 북양신군은 전쟁해서 이길 수가 없는 강한 상대였기 때문에 협상에 응합니다. 이때 위안스카이는 자신이 청 제국의 실권을 잡고 있는 것과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을 이용해 자신의 야심을 채울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위안스카이는 혁명정부 총통의 자리를 자신에게 주면 혁명군의 뜻대로 황제를 폐위하고 공화국을 세운다고 쑨원에게 제시했습니다. 쑨원은 공화국 체제를 지킬 것과 수도를 난징으로 옮긴다는 조건으로 이를 승낙했습니다. 쑨원으로부터 총통직을 받은 위안스카이는 청 황실에 압력을 넣어 1912년 청 제국은 무너졌습니다.

 

- 쑨원. 우리나라의 최고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음 -

 

 

 

 

1913년 혁명세력이 국민당을 창당했습니다. 총통직을 통해 권력을 독점하려던 위안스카이의 뜻과는 다르게 국민당의 인기가 높아지고 선거에서 다수당을 차지하자 위안스카이는 국민당의 쑹자오런을 암살하고 국민당을 강제 해산시켜버리는 등 독재체제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를 했습니다. 결국 또다시 혁명군이 조직되어 전쟁을 벌이지만 위안스카이는 혁명을 제압했고 쑨원은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위안스카이는 중국 내부의 적들을 모두 제거하자 공화제를 폐지해버리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습니다. 연호를 홍헌이라 정하고 국명을 중화제국이라 공표한 이 사건을 홍헌제제라고 합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의 황제 등극에 중국 곳곳에 반대 의견이 나왔고 량치차오 등이 황제에 반대하며 호국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위안스카이의 측근들조차 위안스카이에게 황제 퇴위를 얘기하자 위안스카이는 3개월 만에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오며 황제 이전의 총통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위안스카이에 대한 여론이 매우 나빠져 위안스카이의 완전 퇴위 얘기가 나오자 위안스카이는 화병에 못 이겨 죽고 말았습니다. 

 

- 황제에 즉위하는 위안스카이 -


 

 

이번화에서는 청나라 군사조직의 변화와 청나라의 멸망과 근대 이후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북양군벌이 등장하기까지 사전에 알아야 할 지식이 많아서 서론이 꽤 길어졌습니다. 다음화에서는 본격적인 북양군벌의 활동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자료 : 

알랭 루, 「20세기 중국사」

조관희, 중국현대사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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